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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버나움 (2018) - 나딘 라바키
    김향기의 사생활/Watchaplay 2020. 4. 6. 19:23

      재작년, 한국을 뜨겁게 달궜던 이슈가 있었습니다. '난민'입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많은 인구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난민이 되었습니다. 난민 사회라고 할만큼 시리아 뿐 아니라 전쟁이나 기근, 여러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주하는 현상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오늘 제가 소개할 영화 가버나움 속에서 그들이 왜 떠나야 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가버나움 (출처: 다음 영화) "이 영화는 감동 영화가 아닙니다"

     

    --- 스포주의 ---

    줄거리

     가난과 빈곤의 연속인 레바논. 그 중 열악한 베이루트 빈민가에 살고 있는 자인. 자인은 대가족이다. 좁은 집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자인의 가족들은 내일의 희망을 꿈꾸지 못한 지 오래다. 하지만 그에겐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여동생인 사하르가 있다. 그들은 삶의 각박함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행복도 잠시 집을 유지할 힘이 없어진 자인의 부모님은 집에 계속 사는 대신 사하르를 아사드에게 시집 보내게 된다. 사하르의 나이는 11세였다.

     

     충격을 받은 자인은 그대로 떠나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만난 은인 라힐을 만난다. 라힐은 에티오피아에서 불법 체류중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며 가족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체류증이 만료된 라힐은 경찰에게 붙잡히고, 어린 요나스와 자인이 집에 덩그러니 남게 된다. 조금이라도 벌어보려고 집에서 배운 범죄수법으로 돈을 모으지만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자인은 체류/불법 입양 등을 하는 브로커 아스프로에게 요나스를 넘기고 받은 돈으로 자신도 떠나고자 집에 신분증을 가지러 간다. 하지만, 자인은 집안 형평상 호적에 올리지 못하여 좌절하게 되고, 사하르가 임신하던 중에 죽었다는 소식에 남편인 아사드를 칼로 찔러 감옥에 가게 된다.

     

     감옥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좌절감에 빠진 그는 한 티비쇼에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는 내용으로 사연을 내보내게 된다. 그리고 부모에게 재판을 걸게 되고, 자인은 자신의 신분을 얻게 된다.

     

    요나스와 자인, 냄비를 팔기 위해 시장으로 걸어가는 장면 (출처: 다음 영화)

    자문자답 Q&A

    Q. 왜 중간 중간에 십자가가 보일까?

    A. 십자가가 곳곳에 있는 이유는 공간적 배경과 감독이 시사하는 바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공간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레바논은 종교 내전이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 심해지고 있으며 베이루트는 그 혼란의 중심지이다. 곳곳에 그려져 있는 십자가는 종교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십자가를 가장 참혹한 순간에 역설적으로 비춘다. '소망'의 역할을 하는 십자가. 그녀가 가버나움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지은 이유도 아마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직접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보다 긍휼과 위로가 필요한 도시임을 부각시켜주는 장치로 사용된다.

     

    Q. 영화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

    A. 영화 제목이 베이루트 빈민가가 아닌 가버나움이다. 가버나움은 무엇을 뜻하는걸까?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한 도시의 이름이다. 가버나움을 번역하면 '나훔의 도시'라는 뜻이며 '나훔'은 위로를 뜻한다. 가버나움이란 위로의 도시란 뜻이다. 감독이 이 빈민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면서 내비추고 싶었던 메시지는 결국 그들에게는 위로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실질적인 도움과 종교적 분쟁을 넘은 진정한 평화를 소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MI: 성경에서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의 소도시로 많은 환자들이 즐비해있다. 성경은 이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심과 동시에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를 비춘다. 환자가 상징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주의로 인해 영적으로 마비된 상태임을 고발하는 것이며, 이를 회복하고 구원받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그와 동시에 위로의 도시가 되지 못했던 가버나움이 예수로 인해 진정한 위로를 얻는 상징성을 지닌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자인과 사하르 (출처: 다음 영화)

    감상평 및 한 줄평

      영화는 2시간이라는 런닝타임 동안 많은 시각들을 보여준다. 빈민가의 현실 뿐만 아니라 불법 체류자의 현실과 난민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그려낸다. 내가 이걸 영상으로 본다는 것이 민망했다. 나조차 가진 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미안했다. 숙연해졌다. 마지막의 자인의 웃음을 보며. 내가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내일을 기다리는 이 행위도 누군가는 못하고 있겠구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빈부 격차는 왜 존재하는 건지, 왜 저들은 아파해야하는지.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원망하고, 슬퍼했다. 내가 가진 자로서, 믿는 자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 

     

     마지막에 다다를 때, 나를 분노케 한 장면이 있었다. 위로차 온 카톨릭 신자들과 신부들이 감옥에 와서 기타를 치며 위문 공연 비슷한 걸 하는 장면이었다. 많은 이들은 이 흥겨운 장단에 춤을 추지만 정작 고통 속에 시달리는 자인과 나힐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종교적이었다는 것이 화가 났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렇게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인가?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가 찬양 한 소절일까 하며.

     

     현재 많은 한국교회들이 이처럼 행한다. 불구덩이 속에 있는 이들에게 불을 꺼주려고 손을 데지는 못할 망정 자신들에게 불이 번지지 않게 물만 비축하고 있다. 가진 자의 횡포가 날로 심해진다. 이럴수록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다시 재고해봐야 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조차도 이 본질을 잊고 산다. 이웃은 믿는 사람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옆에 있는 사람, 넓게는 모든 이들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가버나움이 돼야 한다. 나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실 이 영화를 보며 가장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종교주의에 빠진 기독교인이다. 종교에 열광하고 있다. 올바른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기 위해선 이런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이는 남에게 하는 경고가 아닌 나에게 하는 경고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질 것, 소외된 이들에게 적어도 내일을 꿈꿀 수 있을만한 도움을 줄 것, 전심으로 사랑할 것.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분께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릴 것. 이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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